십승지(十勝地)/십승지 안내 및 지도

십승지지(十勝之地) 개념 및 위치

맹돌이2 2022. 11. 28. 12:28

십승지지(十勝之地)

 

 

십승지지 개념

 

십승지지(十勝之地)는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의 하나이다.

『정감록(鄭鑑錄)』에 근거한 역사적 용어이며, 십승지(十勝地) 라고도 한다.

 

십승지지에 관한 기록은 『정감록』 중에 감결(鑑訣),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운기귀책(運奇龜策),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등에 나타난다.

 

대체적으로 공통된 장소는

1) 풍기 금계촌(金鷄村)

2) 봉화 화곡(華谷)

3)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 근처

4) 남원 운봉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銅店村)

5) 예천 금당실(金塘室)

6) 공주 계룡산의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

7) 영월 정동(正東)쪽 상류

8) 무주 무봉산 동쪽

9) 부안 호암(壺巖) 아래

10) 합천 가야산의 만수동(萬壽洞) 동북쪽 이다.

 

이 중에서 위치를 현재의 지명으로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는 곳은

운봉의 동점촌, 무풍의 북동쪽, 부안의 호암, 가야산의 만수동이다.

 

영월 정동쪽 상류는 오늘날의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풍기의 금계촌은 영주군 풍기읍의 금계동·욕금동·삼가동 일대,

공주의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는 공주군 유구면과 마곡면을 각각 흐르고 있는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의 지역,

예천 금당동 동북쪽은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의 금당실(金塘室) 지역,

보은의 증항 근처는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인 시루봉 아래 안부(鞍部) 지역,

안동의 화곡은 봉화군 내성면 지역,

단양의 영춘은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 부근 등으로 파악되고 있다.

 

 

 십승지지 위치

 

십승지의 위치에 관해 『정감록』「감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몸을 보전할 땅있으니, 풍기 금계촌, 안동 화곡, 개령 용궁, 가야, 단춘,

공주 정산 마곡, 진천 목천, 봉화, 운봉 두류산, 태백으로 길이 살 수 있는 땅이다.”

 

이어서 십승지의 구체적인 지리적 위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골 사이에 있다.

둘째는 화산 소령 고기 청양현에 있는데, 봉화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갔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증항 근처,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 행촌이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으로 유구 마곡의 두 물골의 둘레가 2백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난을 피해 종적을 감출만 하다.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북쪽동방 상동으로 피난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 아래가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 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그 둘레가 2백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

정선현 상원산 계룡봉 역시 난을 피할 만하다.

 

십승지지는 『정감록』의 문헌에 따라 위치와 장소가 조금씩 달리 나타나며 추가되기도 하였다.

 

「남격암 산수 십승 보길지지」에는 감결에서 말한 열 곳 외에도 여러 장소가 더해졌다.

그 지역은 모두 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으로서, 풍기와 영주, 서쪽으로 단양과 영춘,

동쪽으로 봉화와 안동이 보신처라고 하였고,

내포의 비인과 남포, 금오산, 덕유산, 두류산, 조계산, 가야산, 조령, 변산, 월출산, 내장산,

계룡산, 수산, 보미산, 오대산, 상원산, 팔령산, 유량산, 온산 등도 해당 장소로 들었다.

 

한편 『정감록』의 「서계이선생가장결」에는

“황간 영동 사이에는 가히 만 가호가 살아나고 청주 남쪽과 문의 북쪽 역시 모습을 숨길 수 있다.”고

다시 몇 군데가 추가되었다.

 

십승지는 전란이 미치지 않아서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오늘날에도 『정감록』에서 지점된 십승지가 모두 지리적으로 내륙의 산간 오지에 위치하며,

한양이나 고을로 이어지는 큰길에 인접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까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십승지 관념은 청학동 이상향 관념과도 결합하였다.

『정감록』에서 십승지로 지점된 위치에서 지리산 청학동은 원래 포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와 근대에 이르러 청학동과 십승지의 장소이미지가 상호 결합하여

‘십승지 청학동’이라는 장소성을 이루게 되었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지리산 중에는 청학동이 있는데 십승지의 하나라고 한다.”(『頭流山遊錄』)거나,

“청학동은 세상 사람들이 신선의 고향이니 십승지지니 하여 널리 전하던 바이라”(『개벽』 제34호, 1923년 4월 1일)는

표현이 당시의 사회적 인식을 잘 말해준다.

 

 

십승지지에 대한 평가

 

이상적인 주거지의 위치와 모습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사회적으로 재구성된다.

십승지지는 조선 후기 민간인의 이상향 담론이었다.

그들은 십승지로 지목된 곳을 찾아 삶터를 개척하고, 미래의 희망을 꿈꾸며 생활을 일구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가치의 지배로 생태환경의 위기와 거주의 진정성이 위협받는 사회 현실에서,

승지의 문화전통과 생활사의 의미를 돌이켜볼 가치가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다음백과

 

 십승지지 지리상 위치